계약서를 안 읽다가 당한 일들

계약서를 안 읽다가 당한 일들

계약서를 안 읽다가 당한 일들

첫 번째 사건: 수정 무제한의 지옥

프리랜서 1년 차였다. 클라이언트가 좋은 사람 같았다. 웃으면서 “한프리님 포트폴리오 정말 마음에 들어요”라고 했다.

계약서 받았다. 대충 훑어봤다. 금액 확인하고 바로 싸인했다.

“수정은 3회까지 무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수정 요청은 합리적 범위 내에서 진행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합리적’의 기준은 클라이언트가 정했다.

첫 시안 보냈다. “좋은데요, 약간만 수정해주세요.”

12번 수정했다. 12번.

색 바꾸고, 레이아웃 바꾸고, 다시 원래대로 돌리고, 또 바꾸고.

“어제 말씀하신 A안으로 다시 가면 안 될까요?”

300만원 프로젝트에 한 달 반을 썼다. 시급으로 계산하면 최저임금도 안 됐다.

그때 배웠다. “수정 N회”를 명확히 명시하지 않으면 끝이 없다는 걸.

두 번째 사건: 지연 페널티는 나만

2년 차 여름이었다. 스타트업 브랜딩 프로젝트. 600만원. 큰 건이었다.

계약서에 이렇게 써 있었다. “작업 기간 60일, 납기 지연 시 일당 5만원 차감.”

나는 봤다. 근데 다른 조항은 안 봤다.

“클라이언트의 피드백 지연은 작업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었다.

시안 보냈다. 2주 뒤에 피드백 왔다. “죄송해요, 대표님이 출장 가셔서요.”

수정안 보냈다. 또 2주. “내부 검토 중입니다.”

최종안 보냈다. 또 10일. “이사회 승인 기다리고 있어요.”

결국 90일 걸렸다. 클라이언트 피드백 대기 시간만 40일.

근데 나한테 청구서 왔다. “30일 지연, 150만원 차감.”

항의했다. “피드백 늦으신 거잖아요.”

“계약서 보세요. 저희 피드백 지연은 별개입니다.”

그때 배웠다. 페널티는 쌍방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걸.

지금은 이렇게 쓴다. “클라이언트 피드백 지연 시 납기 자동 연장.”

세 번째 사건: 저작권은 누구 거?

3년 차 봄. 화장품 브랜드 패키지 디자인. 800만원.

작업 끝났다. 돈 받았다. 포트폴리오 올렸다.

일주일 뒤 연락 왔다. “한프리님, 포폴 내려주세요.”

“네? 왜요?”

“저작권이 저희한테 있어요. 계약서에 있습니다.”

확인했다. 있었다. “본 프로젝트의 모든 저작권은 갑(클라이언트)에게 귀속된다.”

포트폴리오 권리도 없었다. 수정도 못했다. 2차 사용도 못했다.

내 작업물인데 내 거가 아니었다.

더 황당한 건 1년 뒤였다. 그 클라이언트가 내 디자인을 다른 제품에도 썼다. 추가 비용 없이.

“저작권 저희 거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계약서에 그렇게 써 있었으니까.

지금은 이렇게 쓴다. “저작권 양도 시 추가 비용 발생. 포트폴리오 사용 권리는 을(디자이너)에게 있음.”

저작권 양도하려면 최소 30% 더 받는다.

네 번째 사건: 선금 없이 시작한 참사

4년 차 겨울. 광고 대행사에서 연락 왔다. “급한 프로젝트인데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450만원. 2주 작업. 괜찮았다.

“선금은요?”

“저희는 프로젝트 완료 후 일괄 정산이에요. 대행사라서요.”

믿었다. 대행사면 괜찮겠지.

2주 밤샘하면서 끝냈다. 최종 파일 넘겼다.

“정산은 언제쯤 되나요?”

“다음 달 25일이요.”

다음 달 25일. 연락 없었다. 내가 연락했다.

“아, 클라이언트 쪽에서 아직 입금이 안 됐어요.”

또 한 달.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3개월 뒤에야 받았다. 그것도 100만원 깎여서.

“클라이언트가 수정 많았다고 차감했어요.”

싸우기 싫었다. 350만원이라도 받았다.

계약서에 이렇게 써 있었다. “최종 금액은 클라이언트 평가 후 확정.”

그때 배웠다. 선금 50%는 무조건이라는 걸.

지금은 선금 안 주는 곳이랑 안 한다. 아무리 급해도.

다섯 번째 사건: 비밀유지 조항의 함정

2년 차 가을. 스타트업 앱 디자인. 500만원.

계약서에 “비밀유지의무” 조항이 있었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렇게 써 있었다. “프로젝트 관련 모든 사항은 영구적으로 비밀유지. 포트폴리오 사용 시 사전 서면 동의 필수.”

작업 끝나고 포폴 올리려고 연락했다.

“안 됩니다. 저희 서비스 아직 런칭 전이에요.”

1년 뒤. “아직이요.”

2년 뒤. 그 스타트업 망했다.

내 포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500만원짜리 작업이 증명 불가능.

이력서에 “비공개 프로젝트”라고만 쓸 수밖에.

지금은 이렇게 쓴다. “비밀유지 기간은 서비스 런칭 후 3개월까지. 포트폴리오는 회사명 비공개 조건으로 사용 가능.”

내 커리어도 중요하니까.

여섯 번째 사건: 계약 해지 조항

3년 차 여름. 장기 프로젝트. 월 300만원씩 6개월.

계약서에 “해지 시 30일 전 통보” 조항이 있었다. 클라이언트만.

나는? “을은 즉시 해지 불가. 위약금 50% 발생.”

2개월 차에 다른 큰 프로젝트 들어왔다. 시간이 안 됐다.

“죄송한데 계약 종료하면 안 될까요?”

“위약금 600만원입니다. 남은 4개월치 50%요.”

안 할 수도 없었다. 600만원은 너무 컸다.

결국 둘 다 했다. 한 달 동안 하루 4시간씩만 잤다.

큰 프로젝트는 퀄리티 낮아졌고, 장기 프로젝트는 연장됐다.

그때 배웠다. 해지 조항은 동등해야 한다는 걸.

지금은 이렇게 쓴다. “쌍방 30일 전 통보 시 위약금 없이 해지 가능.”

일곱 번째 사건: 부가세의 비밀

1년 차. 처음 받은 큰 프로젝트. 1000만원.

“천만원 받는다!” 기뻤다.

계약서에 “공급가 1000만원” 이렇게만 써 있었다.

세금계산서 끊었다. 1000만원 + 부가세 100만원 = 1100만원 받는 줄 알았다.

입금 확인했다. 1000만원.

“부가세는요?”

“계약 금액이 1000만원이잖아요. 부가세 포함이요.”

실수령액 910만원. (부가세 100만원 나중에 환급받음)

지금은 무조건 “부가세 별도”라고 쓴다. “공급가 1000만원 (VAT 별도)”

10% 차이는 크다.

지금 내 계약서

이제 내 계약서는 이렇다.

작업 범위

  • 작업 항목 구체적으로 (메인 5페이지, 서브 10페이지)
  • 수정 횟수 명시 (3회, 추가 시 회당 50만원)
  • 추가 요청 시 별도 견적

기간 및 일정

  • 총 작업 기간 (클라이언트 피드백 기간 제외)
  • 피드백 기한 (7일 이내, 초과 시 납기 자동 연장)
  • 지연 페널티 (쌍방 동일, 일 5만원)

금액 및 지불

  • 총 금액 (부가세 별도)
  • 선금 50% (작업 시작 전)
  • 잔금 50% (최종 파일 전달 전)
  • 지불 기한 (7일 이내)

저작권

  • 기본 사용권만 양도 (특정 프로젝트 내)
  • 저작권 완전 양도 시 +30%
  • 포트폴리오 사용권은 디자이너 보유
  • 2차 사용 시 별도 협의

해지 조항

  • 쌍방 30일 전 통보
  • 진행분은 정산 후 해지
  • 클라이언트 귀책 시 50% 지급
  • 디자이너 귀책 시 선금 반환

기타

  • 비밀유지 기간 (서비스 런칭 + 3개월)
  • 분쟁 해결 (서울중앙지방법원 관할)
  • 계약서 수정은 서면 합의

A4 3장 분량. 처음엔 “너무 깐깐하다”고 했다.

근데 제대로 된 클라이언트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까다롭게 구는 곳은 애초에 거를 수 있었다.

계약서 협상 팁

1. 수정하자고 먼저 말하기

“계약서 검토했는데 몇 가지 수정하면 안 될까요?”

클라이언트 계약서 그대로 쓰면 100% 불리하다.

2. 구체적 숫자로

“합리적 범위” “적절한 기간” 이런 거 다 빼기.

“수정 3회” “피드백 7일 이내” 이렇게.

3. 버릴 건 버리기

“저작권 양도는 어렵습니다. 대신 사용권은 드릴게요.”

안 되면 금액 올리기.

4. 계약서 읽는 시간 갖기

“계약서 검토 후 내일 회신 드릴게요.”

현장에서 바로 싸인 요구하면 의심부터.

5. 변호사 검토 (큰 건은)

500만원 넘는 프로젝트는 20만원 주고 변호사 검토.

나중에 1000만원 날리는 것보다 훨씬 싸다.

지금도 실수는 한다

한 달 전. 급한 프로젝트. 계약서 대충 읽었다.

“폰트 라이선스는 을이 책임진다”는 문구 못 봤다.

폰트 라이선스 300만원 나갔다.

몇 번 당해도 또 당한다. 바쁘면 방심한다.

그래도 예전보단 낫다. 1년 차 때는 계약서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프리랜서 계약서 체크리스트

내가 만든 체크리스트다. 프로젝트 들어올 때마다 확인한다.

□ 작업 범위가 구체적인가?
□ 수정 횟수가 명시되어 있나?
□ 추가 작업 비용 조항이 있나?
□ 페널티가 쌍방에 적용되나?
□ 선금 조항이 있나?
□ 저작권 조항을 확인했나?
□ 포트폴리오 사용 가능한가?
□ 해지 조항이 공평한가?
□ 부가세 별도인가?
□ 비밀유지 기간이 합리적인가?

하나라도 이상하면 수정 요청한다.

안 되면 안 받는다.


계약서는 안 읽으면 그냥 “네” 하고 도장 찍는 거랑 같다. 몇 번 당하고 나서야 배웠다. 지금은 계약서 읽는 시간이 작업 시간만큼 중요하다는 걸 안다. 아직도 실수하지만, 예전처럼 크게는 안 당한다. 그게 성장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