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작업의 늪: '조금만 더'는 무한반복
- 28 Dec, 2025
오후 7시, 시작
저녁 먹으려던 참이었다.
“한프리님~ 확인했는데요, 색상 조금만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폰트도요.”
카톡이 왔다. 클라이언트다.
‘조금만’이라는 단어. 프리랜서의 적이다.
오후 내내 작업했던 메인 페이지 디자인. 3차 시안까지 보냈다. OK 사인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네, 확인하겠습니다.”
라고 답장했다. 밥은 나중에.

수정 1차: 색상
“좀 더 밝게요. 근데 너무 밝으면 안 되고요.”
밝기를 올렸다. 10분 걸렸다.
“이건 너무 밝아요. 중간으로 해주세요.”
중간으로 했다. 5분.
“음… 처음 거랑 이거 중간?”
처음 거. 그러니까 내가 오후 3시에 보낸 그 파일 말이다.
심호흡. 저장. 전송.
“아 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시계를 봤다. 8시 15분.
저녁은 식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수정 2차: 폰트
“폰트가 좀 딱딱해 보여요. 부드러운 느낌으로요.”
산세리프를 명조로 바꿨다.
“아니 이건 너무 클래식해요. 좀 더 모던하게요.”
모던한 산세리프로 돌아왔다. 원점이다.
“근데 이거 처음 거 같은데요?”
”…조금 다릅니다.”
사실 똑같다. 근데 ‘다르다’고 하면 OK 나올 때가 있다.
“음, 그래도 뭔가…”
안 먹혔다.

수정 3차: 레이아웃
“배치를 좀 바꿔볼까요? 왼쪽에 있던 걸 오른쪽으로요.”
이건 구조 변경이다. ‘조금’이 아니다.
하지만 말 안 했다. 말하면 “그래도 한번만요~” 나온다.
30분 걸렸다. 왼쪽을 오른쪽으로 옮기는 게 생각보다 복잡하다. 전체 밸런스가 깨진다.
“확인했어요. 근데 왼쪽이 나았던 것 같아요.”
핸드폰을 던지고 싶었다. 안 던졌다. 비싸다.
“네, 원래대로 돌리겠습니다.”
복사해둔 파일 열었다. Ctrl+Z 여러 번. 전송.
“아 근데 이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시계를 봤다. 9시 40분.
배가 안 고프다. 스트레스로 포만감이 온다.
계약서를 다시 봤다
파일을 찾았다. 내가 쓴 계약서.
“수정: 2회까지 무료”
라고 써놨다. 분명히 써놨다.
근데 지금 몇 번째인가. 세어봤다.
1차 시안 수정 3번. 2차 시안 수정 5번. 3차 시안 수정… 지금 진행 중.
계약서는 있는데 지키는 사람이 없다.
내가 “수정 횟수 초과입니다” 말해야 하는데. 못 한다.
다음 일이 안 들어올까봐. 클라이언트가 기분 나빠할까봐.
프리랜서는 을이다. 항상.

수정 4차: 사장님 의견
“한프리님, 죄송한데요. 사장님이 보시더니 의견이 있으시대요.”
새로운 등장인물이다. 최종 결정권자.
지금까지 누구랑 일한 거지.
“로고를 크게 해주세요. 3배 정도요.”
3배. 디자인 밸런스 다 깨진다.
“그리고 색상은 빨강으로요. 우리 회사 대표 색이거든요.”
처음부터 얘기하지.
“텍스트는 전부 고딕으로 통일해주세요.”
명조 쓰자고 한 게 누군데.
“내일 아침까지 가능할까요? 급해서요.”
지금 10시 30분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커피를 내렸다. 네 번째 잔이다.
자정
작업 끝났다.
사장님 의견대로 다 바꿨다. 로고는 3배. 빨강. 고딕.
솔직히 못생겼다. 내 포트폴리오엔 안 들어간다.
하지만 돈은 받아야 한다.
전송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답장이 왔다.
“내일 오전에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내일. 또 수정 들어온다는 뜻이다.
노트북 덮었다. 침대로 갔다.
고양이가 내 자리에 누워있다. 비켜나지 않는다.
괜찮다. 소파에서 자지 뭐.
계약서를 고쳐야 한다
다음 날 오후. 수정 요청 또 왔다.
“사장님이 다시 보시더니…”
읽다가 껐다. 일단 커피부터.
그리고 결심했다. 계약서를 고친다.
“수정 2회 포함. 추가 수정 시 회당 X만원 청구”
금액을 명시한다. 횟수도 세서 기록한다.
‘조금만’이라는 말에 속지 않는다.
사장님 의견은 처음부터 받는다.
급하면 추가 금액 받는다.
내 시간도 돈이다. 밤 10시 이후는 야간 할증이다.
이렇게 못 하면 계속 당한다. 5년째 배우는 중이다.
계약서 고치는 건 쉽다. 지키는 게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