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메일 확인이 프리랜서의 하루를 결정한다

오전 메일 확인이 프리랜서의 하루를 결정한다

오전 메일 확인이 프리랜서의 하루를 결정한다

눈 뜨자마자 노트북

알람보다 불안이 먼저 깬다.

눈 뜨면 핸드폰. 메일 앱부터 연다. 아직 침대에 누워있는데 벌써 심장이 두근거린다.

새 메일 7개.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프로젝트 제안일 수도 있고, 클레임일 수도 있고, “급합니다”일 수도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이미 하루가 결정된다. 프리랜서 4년 차, 아직도 아침이 제일 무섭다.

제목만 봐도 알아

메일함 열면 제목만으로 다 보인다.

“[문의] 견적 요청 드립니다” - 심장 뛴다. 새 프로젝트다.

“RE: 수정 요청사항” - 한숨 나온다. 또 고치라는 거다.

“긴급) 오늘 중으로 가능할까요?” - 짜증 난다. 너는 급해도 나는 일정이 있다고.

제목 순서대로 열지 않는다. 전략적으로 연다. 좋은 것부터? 나쁜 것부터?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요즘은 나쁜 것부터 본다. 최악을 먼저 보면 나머지가 괜찮아 보인다. 심리 작전이다.

견적 요청 메일의 함정

“안녕하세요, 한프리님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연락드립니다.”

이 문장이 나오면 일단 기분 좋다. 포트폴리오 봤다는 건 성의가 있다는 뜻이다. 아무한테나 보내는 스팸 아니라는 거다.

“쇼핑몰 리뉴얼 프로젝트인데요, 페이지 약 30개 정도입니다.”

30개. 계산기 두드린다. 페이지당 20만원이면 600만원. 15만원이면 450만원. 실제로는 협상 들어가면 400 안팎일 거다.

“예산은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이 문장이 나오면 오히려 긴장된다. ‘넉넉하다’는 사람치고 실제로 넉넉했던 적이 없다. 대부분 200~300 부른다.

“일정이 좀 촉박한데, 2주 안에 가능할까요?”

30페이지를 2주. 하루에 2페이지씩 뽑으라는 소리다. 수정 기간 빼면 실제로는 10일. 불가능은 아닌데 다른 일을 다 미뤄야 한다.

답장 쓴다. “안녕하세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공손하게 시작한다. 견적서는 오후에 보낸다. 바로 보내면 일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프리랜서의 자존심이다.

수정 요청의 지옥

“RE: RE: RE: 수정 요청사항”

RE가 세 개면 이미 네 번째 수정이다. 계약서에는 수정 2회까지라고 명시했는데, 클라이언트는 절대 안 읽는다.

메일 연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거의 다 왔는데요, 몇 가지만 더 수정 부탁드립니다.”

‘몇 가지’가 15개다. 리스트가 스크롤로 내려간다.

  1. 메인 비주얼 색상을 좀 더 밝게
  2. 로고 위치를 3px 왼쪽으로
  3. 폰트를 다시 처음 거로 (1차 시안으로 돌아가라는 소리)
  4. 버튼 모양을 라운드로
  5. 전체적인 느낌을 고급스럽게…

‘느낌’을 고급스럽게. 이게 제일 어렵다. 느낌은 주관적이다. 내가 고급스럽다고 만들어도 클라이언트는 아니라고 한다.

답장 쓴다. “확인했습니다. 수정 작업 후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속으로는 욕한다. 계약서 다시 꺼내본다. ‘수정 2회 포함, 추가 수정 시 회당 30만원.’ 이거 받아낼 수 있을까.

대부분 못 받는다. ‘이 정도야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합리화한다. 다음 프로젝트 받으려면 관계 유지해야 한다.

프리랜서는 을이다. 아무리 계약서가 있어도 을이다.

”급한데 오늘 가능하세요?”

이 메일이 제일 싫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급한 건이 생겨서요. 오늘 중으로 PPT 디자인 가능할까요? 30장 정도인데 내일 아침 발표라서요.”

30장을 오늘. 지금 오전 10시다. 실제 작업 시간은 12시간. 한 장당 24분. 불가능하다.

하지만 거절하면 다음에 안 준다. “한프리님은 바빠서 안 되시더라고요”라고 소문난다. 프리랜서 세계는 좁다.

답장 쓴다. “확인했습니다. 러프한 느낌으로 먼저 보내드리고, 내일 수정 가능할까요?”

협상이다. 완성도를 낮춰서 시간을 번다. 클라이언트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급하니까.

견적은 평소보다 50% 올린다. 급한 건 급료가 붙는다. 이건 당연한 거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많다. “예산이 정해져 있어서요.” 그럼 급한 거 아니잖아. 진짜 급하면 돈 더 준다.

결국 평소 가격에 받는다. 오늘 야근 확정이다. 저녁 약속 취소한다. 또.

클라이언트 잠수의 공포

제일 무서운 건 답장이 없을 때다.

최종 시안 보냈다. 3일 전이다. 읽음 표시는 떴는데 답이 없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한 번 더 보낸다. 또 읽음. 또 무응답.

불안해진다.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아니면 다른 디자이너 알아보는 건가. 돈은 선금만 받았다. 잔금 300만원이 공중에 떠 있다.

통장 확인한다. 잔고 150만원. 이번 달 카드값 200만원. 이 돈 못 받으면 마이너스다.

또 메일 보낸다. “확인하셨을까요? 수정 사항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너무 간절해 보이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간절하다.

3일째 되는 날 답장 온다. “죄송합니다. 내부 검토 중이었어요. 일단 이대로 진행할게요.”

화나지만 웃는다. “감사합니다. 최종 파일 보내드리겠습니다.”

잔금 입금 확인될 때까지 불안하다. 입금되면 그때 진짜 끝이다. 그 전까지는 프로젝트가 끝난 게 아니다.

메일함이 비어있는 아침

가끔 새 메일이 0개인 날이 있다.

처음엔 좋다. ‘오늘은 여유 있게 내 작업 하자.’ 포트폴리오 정리하고, 공부도 하고.

점심 때쯤 또 확인한다. 여전히 0개.

오후 3시. 또 확인. 스팸 메일도 없다.

저녁 6시. 불안해진다. 왜 아무도 연락 안 하지. 나한테 문제 있나.

밤 10시. SNS 뒤진다. 다른 프리랜서들 글 본다. “프로젝트 4개 동시에 돌려서 미치겠다” - 부럽다.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메일 확인. 새 메일 1개.

“견적 요청 드립니다.”

살았다. 오늘은 일할 수 있다.

메일이 만드는 롤러코스터

프리랜서의 하루는 오전 메일로 결정된다.

좋은 메일이 있으면 하루 종일 기분 좋다. 작업도 잘 된다. 효율이 200%다.

나쁜 메일이 있으면 하루 종일 찝찝하다. 커피를 네 잔 마신다. 집중이 안 된다.

메일이 없으면 하루 종일 불안하다. 핸드폰을 20번 확인한다. ‘혹시 와이파이 문제인가’ 싶어서 데이터로도 확인한다.

회사 다닐 때는 출근하면 일이 있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됐다. 월급날이 정해져 있었다.

지금은 메일이 일을 만든다. 메일이 돈을 만든다. 메일이 미래를 결정한다.

오전에 메일함 여는 순간, 오늘 하루가 어떨지 알 수 있다. 이번 달이 어떨지도.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기대된다.

그래도 확인은 한다

매일 아침 똑같다.

눈 뜨면 핸드폰. 메일 앱. 심장 두근거림.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다. 아무것도 없는 날도 있다.

하지만 확인은 한다. 안 볼 수가 없다.

프리랜서니까.

오전 메일이 내 하루를 결정하니까.


메일 0개인 날이 제일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