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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 03 Dec, 2025
'오늘 중으로 가능해?'라는 요청에 야근하게 되는 메커니즘
"오늘 중으로 가능해?"라는 요청에 야근하게 되는 메커니즘 오후 3시의 카톡 "한프리님, 급한데 오늘 중으로 가능해요?" 이 메시지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식는 걸 느낀다. 근데 손가락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네 가능합니다!" 보내고 나서 후회. 3초 만에 후회. 근데 이미 늦었다. 읽음 표시 떴다. 클라이언트는 이미 "감사합니다ㅠㅠ" 보냈다. 왜 또 이러지.'YES'부터 나오는 입 4년째 프리랜서 하면서 배운 건 많다. 견적서 쓰는 법, 계약서 쓰는 법, 세금 신고하는 법. 근데 못 배운 게 하나 있다. 거절하는 법. "이틀 걸리는데요"라고 말하면 될 걸, "해볼게요"가 먼저 나온다. "일정이 빠듯한데요"라고 하면 될 걸, "가능합니다"가 입에서 튀어나온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첫 번째, 일 없을까 봐 불안하다. 이번 달 통장 잔고 245만원. 카드값 빠지면 150만원. 다음 달 일정은 텅 비어있다. 그러니까 거절이 안 된다. "오늘 안 되면 다른 분께"라는 말이 들릴 것 같다. 두 번째, 평가받기 싫다. "저 사람 융통성 없네"라고 생각할까 봐. "바빠 보이네, 다음엔 다른 디자이너한테"라고 할까 봐. 프리랜서는 평판이 전부다. 소문 안 좋으면 끝이다. 세 번째,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밤새면 되지. 커피 마시면 되지. 집중하면 3시간이면 끝나지. 이런 생각이 3초 만에 스쳐 지나간다. 그래서 "네"라고 한다. 근데 그게 함정이다. 승낙 후 3단계 멘붕 1단계: 허세 타임 (첫 1시간) "괜찮아, 할 수 있어." 커피 한 잔 더 내린다. 음악 틀고 노트북 연다. 파일 정리한다. 레퍼런스 찾는다. 아직 여유롭다. 시간 많다. 6시까지 6시간이나 남았다. 2단계: 현실 직면 (2-4시간) 작업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복잡하다. 클라이언트가 준 자료가 엑셀 파일이다. 이미지는 저화질이다. 수정 요청사항이 5개에서 12개로 늘었다. 카톡으로 추가 요청 온다. "아 그리고요"가 세 번 온다. 시계 본다. 7시. 저녁 먹을 시간 없다. 편의점 삼각김밥 먹으면서 작업한다. 3단계: 패닉 모드 (마지막 2시간) 11시. 아직 50%밖에 안 끝났다. 손이 떨린다. 눈이 뻑뻑하다. 고양이가 키보드 위에 올라온다. "비켜"라고 말하는데 목소리가 떨린다. 자정 넘었다. "오늘 중으로"는 12시까지인가, 새벽까지인가. 클라이언트한테 물어볼까. 아니다. 물어보면 "아직 안 끝났어요?"처럼 들린다. 결국 새벽 2시에 보낸다. "완료했습니다" 메시지 보내고 침대에 쓰러진다. 왜 맨날 이러지.급한 일은 왜 항상 급할까 재밌는 건, "오늘 중으로"라는 요청의 90%는 사실 급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달 케이스. "내일 아침 회의 자료인데 오늘 중으로 부탁드려요." 밤새워서 보냈다. 다음 날 오후에 카톡 온다. "회의 일정이 변경돼서 다음 주로 미뤄졌어요." 어이없다. 근데 화낼 수도 없다. 나도 "네"라고 했으니까. 또 다른 케이스. "급해서요, 3시간 안에 가능해요?" 2시간 반 만에 보냈다. 확인 메시지는 3일 후에 왔다. 급한 건 클라이언트가 아니라 나였다. 급하게 답하고, 급하게 작업하고, 급하게 보내는 건 나였다. 클라이언트는 여유롭게 확인한다. 이 패턴 깨달은 건 3년 차 되고 나서다. 늦었다. '가능하다'와 '해야 한다'의 차이 최근에 깨달은 것. "가능해요?"라는 질문에 "가능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게 문제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다. 밤새면 가능하다. 다른 일정 미루면 가능하다. 건강 해치면 가능하다. 근데 '해야 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내 시간, 내 건강, 내 다음 일정을 희생해서까지 오늘 끝낼 필요가 있나. 클라이언트한테는 급해도, 나한테는 급하지 않을 수 있다. 이걸 구분 못 했다. 4년 동안.거절 연습 중 요즘 연습하고 있다.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거. 처음엔 무서웠다. "그럼 다른 분께 맡기겠습니다" 들을까 봐. 근데 막상 해보니까 의외였다. "내일 오전까지는 어려운데, 내일 오후 가능할까요?" "네 괜찮습니다." "이틀 작업 기간 필요한데 괜찮으세요?" "아 네, 급한 건 아니었어요." 거절하니까 존중받는다. 신기했다. "바쁘신데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들었다. 무조건 "네"라고 할 때는 못 들었던 말이다. 물론 아직도 실수한다. 어제도 "가능합니다" 했다가 새벽 1시까지 작업했다. 근데 횟수는 줄고 있다. 10번 중 8번이 10번 중 5번이 됐다. 진전이다. 야근의 숨은 비용 밤새워서 작업하면 다음 날 망한다. 오전 11시에 일어난다. 머리 아프다. 커피 마셔도 집중 안 된다. 다른 프로젝트 미팅이 오후에 있는데 컨디션 최악이다. 말이 꼬인다. 클라이언트가 눈치챈다. 저녁에 또 작업 들어가야 하는데 몸이 안 움직인다. 그래서 또 밤에 몰아서 한다. 악순환이다. 계산해봤다. "오늘 중으로" 요청 한 번 받을 때마다:수면시간 4시간 날림 다음 날 생산성 50% 감소 목, 허리 통증 3일 멘탈 회복 기간 2일이거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일까. 견적에 넣어야 하는 거 아닌가. 급한 일의 추가 비용을 받아야 한다. 정가의 1.5배. 당연한 건데 요구 못 했다. "까다롭다"고 생각할까 봐. 근데 요즘은 말한다. "당일 요청은 50% 할증입니다." 그러면 둘 중 하나다. 내일로 미루거나, 할증 내고 진행하거나. 어느 쪽이든 나한테 좋다. 진짜 급한 일 vs 가짜 급한 일 경험상 진짜 급한 일은 별로 없다. 진짜 급한 일:내일 론칭인데 버그 발견 인쇄 들어가야 하는데 오타 발견 클라이언트 사장님이 직접 전화함가짜 급한 일:"빨리 보고 싶어서요" "시간 되실 때 해주세요" (근데 카톡으로 5번 물어봄) "가능하시면 오늘요"가짜 급한 일이 90%다. 근데 나는 100% 다 급한 것처럼 대응했다. 바보같이. 이제는 묻는다. "언제까지 필요하신가요?" "어떤 일정이신가요?" 구체적으로 물으면 대부분 여유 있다. "아 다음 주까지면 돼요." 그럼 왜 "오늘 중으로"라고 했을까. 습관이다. 클라이언트도 습관적으로 급하다고 한다. 나도 습관적으로 "네"라고 한다. 이 습관의 조합이 야근을 만든다. 요즘 쓰는 답장법 "네 가능합니다" 대신 이렇게 쓴다. "확인했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가능한데 괜찮으실까요?"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이 있어서, 오늘 저녁 이후 시작 가능합니다." "당일 진행은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처음엔 떨렸다. 일감 날아갈 것 같았다. 근데 안 날아갔다. 오히려 존중받는다. 가끔 "그럼 다른 분께"라는 답 온다. 섭섭하다. 근데 그런 클라이언트는 나중에도 문제 생긴다. 급하게 하면 퀄리티 떨어진다. 그럼 "왜 이래요?"라고 한다. 돈도 늦게 준다. 그런 클라이언트 거르는 필터가 된다. "오늘 중으로 안 되면 다른 데"라는 말이. 야근 안 하는 프리랜서가 되려면 완벽하진 않다. 여전히 가끔 "네"라고 하고 후회한다. 근데 예전보단 낫다. 내가 세운 규칙:답장 전에 10분 기다린다. 급하게 답하지 않는다. 일정 확인하고 답한다. 감으로 "되겠지" 하지 않는다. 당일 요청은 할증이다. 예외 없다. "가능해요?" 질문에 "언제까지 필요하세요?" 물어본다. 밤 10시 이후는 작업 안 한다. 내일 하면 된다.규칙 지키면 된다. 근데 그게 제일 어렵다. 어제도 규칙 깼다. "오늘 중으로"에 "네"라고 했다. 11시까지 작업했다. 오늘 일어났을 때 목이 아팠다. 또 후회했다. 근데 횟수는 줄고 있다. 그게 중요하다. 완벽한 프리랜서는 없다. 야근 안 하는 프리랜서도 없다. 근데 '덜' 하는 프리랜서는 될 수 있다. 그게 목표다. 지금 답장 기다리는 메시지 방금 카톡 왔다. "한프리님 내일까지 가능하세요?" 손가락이 "네"를 누르려고 한다. 근데 멈췄다. 일정 확인한다. 내일 다른 작업 있다. 모레까지 하면 여유롭다. "모레 오전까지는 어떠세요?" 보냈다. 심장 두근거린다. 거절할까. 다른 사람한테 갈까. 30초 후. "네 괜찮습니다!" 후. 다행이다. 이런 작은 승리가 쌓인다. 언젠가는 "네 가능합니다"를 습관적으로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4년 걸렸다. 5년째는 더 나아질 것이다. 야근은 선택이 아니라 습관이었다. 습관은 바꿀 수 있다. 천천히.오늘은 10시에 노트북 끈다. 규칙 지킨다. 내일 봐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