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 동료의 외주 연결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이유
- 12 Dec, 2025
전 직장 동료의 외주 연결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이유
목요일 저녁, 카톡 한 통
저녁 7시. 작업 막바지. 전 직장 선배한테 카톡 왔다.
“한프리~ 우리 팀에서 PPT 디자인 급하게 필요한데, 받을 수 있어?”
읽자마자 답장했다. “네! 가능합니다. 언제까지요?”
3초 만에 답장 온다. 프리랜서는 빠른 답장이 경쟁력이다.
선배가 대충 설명해줬다. 40페이지, 다음 주 월요일까지, 예산 80만원.
계산기 두드렸다. 페이지당 2만원. 나쁘지 않다. 주말 이틀 꼬박 매달리면 된다.
“감사합니다. 할게요!”
통화 끊고 나니까 복잡했다. 고맙다. 근데 뭔가 껄끄럽다.

전 직장 동료가 연결해주는 일의 패턴
프리랜서 4년 하면서 깨달은 거. 일의 30%는 전 직장 인맥에서 온다.
선배, 동기, 후배. 다들 회사 다니면서 외주 필요할 때 나한테 연락한다.
패턴이 있다.
첫째, 급하다. “내일까지 가능해?” “이번 주 안에” 여유 있는 프로젝트는 잘 안 온다. 사내 디자이너가 안 되는 걸 나한테 넘긴다.
둘째, 예산이 애매하다. 회사 예산은 있는데 정식 외주 맡기기엔 적다. 그래서 아는 사람한테 부탁한다. “우리 예산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데…”
셋째, 수정 요청이 많다. 클라이언트가 여러 명이다. 팀장, 부장, 임원, 대표. 다들 한마디씩 한다.
넷째, 계약서가 없다. “우리 사인데 뭘 그렇게까지” 그냥 카톡으로 합의하고 시작한다. 나중에 문제 생기면 곤란한 건 나다.
그래도 받는다. 왜냐면 일감이 필요하니까.

고마운 건 진짜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고맙다.
프리랜서 초반 1년은 지옥이었다. 일감 없어서 통장 바닥났다. 부모님한테 손 벌릴 뻔했다.
그때 연락 온 게 전 직장 동기였다. “너 프리랜서 한다며? 우리 팀 로고 만들어줄래?”
60만원짜리 작은 프로젝트. 그때 그 돈이 얼마나 큰지.
그 이후로도 계속 연결해줬다. 동기 팀 프로젝트, 선배 부서 PT, 후배 회사 홈페이지.
포트폴리오도 쌓였다. 대기업 작업물은 아무래도 보기 좋다.
가끔 밥도 산다. “이번 건 수고했어. 밥 사줄게.” 회사 구내식당 밥이 그립다.
이 인맥이 없었으면 지금 나 없다. 그건 확실하다.
근데 왜 이렇게 불편한가
문제는 관계다.
선배한테 견적서 제대로 못 쓴다. “80만원이요? 좀 비싼데…” “아 네, 그럼 70으로 할게요.”
갑과 을이 명확해진다. 전엔 같은 회사 동료였는데.
후배가 수정 요청할 때도 그렇다. “언니 미안한데 이거 하나만 더…” 열 번째 수정이어도 “응, 해줄게” 한다.
거절을 못 한다. 다음 일도 생각해야 하니까.
한 번은 동기가 이랬다. “야 너 진짜 프리랜서구나. 우리가 돈 주는 사람이네.” 농담이었겠지. 근데 웃으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관계가 이제 거래 관계다.

가장 힘든 순간
작년 11월이었다. 선배가 큰 프로젝트 연결해줬다. 브랜딩 작업, 500만원.
3주 동안 매달렸다. 컨셉부터 로고, 명함, 리플렛까지.
최종 발표 전날. 선배한테 전화 왔다.
“한프리야, 미안한데 우리 예산이 잘못 나왔어.” “네? 어떻게요?” “500 중에 200만원만 줄 수 있을 것 같아.”
머리가 하얘졌다. 이미 다 만들었다. 계약서는 없었다.
“선배, 그건 좀…” “야 나도 어쩔 수 없어. 위에서 그러는데. 니가 이해해줘.”
결국 300만원에 합의했다. 선배가 개인돈 100 보탰다.
그날 밤 엄청 울었다. 화가 났다. 근데 누구한테 화를 내야 하나.
선배한테? 그 사람도 직장인이다. 회사한테? 내가 계약서를 안 썼다. 나한테? 그게 맞는 것 같다.
다음 날 선배가 미안하다고 연락 왔다. “진짜 미안해. 밥 사줄게.”
밥으로 해결되는 게 아닌데. 그래도 “괜찮아” 했다.
관계가 깨질까 봐.
언제까지 가능할까
요즘 이 생각 자주 한다. 이 방식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전 직장 퇴사한 지 4년. 동료들이랑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선배는 임원 달았다. 이제 외주 같은 거 직접 안 챙긴다.
동기들은 애 낳았다. 야근도 힘든데 내 일 챙겨줄 여유 없다.
후배들은 이직했다. 새 회사에서 날 모른다.
인맥은 소모품이다. 계속 일만 받으면 마른다.
나도 밥 사고 선물하고 연락한다. 근데 한계가 있다. 나는 프리랜서니까 시간이 곧 돈이다.
가끔 무섭다. 5년 후엔 누가 날 기억할까.
새로운 영업처를 찾아야 한다. 근데 그게 쉽지 않다. 모르는 회사한테 메일 보내면 99% 무시당한다.
전 직장 인맥이 편하다. 그래서 여기에 기댄다. 근데 이게 맞나.
결국 내가 바꿔야 하는 것
지난주에 결심했다. 이제 좀 바꾸자.
첫째, 계약서 쓴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어도. “형식상 필요해서요” 하고 쓴다.
둘째, 견적 안 깎는다. “제 작업 단가가 이래서요” 딱 말한다. 안 되면 안 받는다.
셋째, 수정 횟수 명시한다. “수정 3회까지 포함이에요. 추가는 건당 10만원입니다.” 미안해하지 않는다.
넷째, 새로운 클라이언트 찾는다. 매달 영업 메일 10통씩 보낸다. 거절당해도 괜찮다.
다섯째, 전 직장 인맥은 소중히 한다. 근데 일로만 연결되지 않는다. 일 없어도 연락하고 밥 먹는다.
쉽지 않다. 어제도 선배한테 견적 깎아줬다. “이번만” 하면서.
근데 조금씩이라도 바꾸려고 한다. 안 그러면 5년 후가 더 불안하다.
그래도
전 직장 동료들한테 진심으로 고맙다. 그 사람들 없었으면 진짜 못 버텼다.
다만 이제는 알았다. 관계와 일은 분리해야 한다.
친구면서 클라이언트일 순 없다. 을의 위치에서 우정은 오래 못 간다.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게 서로한테 좋다. 나도 당당하고 상대도 편하다.
그게 진짜 프로다.
작년에 동기가 그랬다. “야 너 이제 진짜 프로같아. 견적서 딱딱 끊어.”
칭찬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프리랜서 5년 차가 되려면. 이런 경계를 잘 그어야 한다.
아직도 어렵지만. 배우는 중이다.
관계는 소중하다. 근데 일은 일이다. 그 줄을 타는 게 프리랜서의 숙제다.
